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자 룩셈부르크 (문단 편집) === 사망 배경에 얽힌 독일 사회주의사 === [[독일 사민당]]은 1913년 제1정당이 될만큼 입지를 굳혀나갔고,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독일 혁명으로 카이저의 제국 정부의 자리를 사실상 군부의 동의속에 인수했다. 즉 [[독일 사민당]]은 주류세력 중 하나였다[* 우파는 기존 세력들과 다를바도 없었고, 자유군단 등 실제 무력 세력조차 가지고 있었다(이들 상당수는 [[장교]] 등 군 출신이었다.).]. 따라서 독일 사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이미 장악한 정권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는 산통을 깰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을 들먹였다가는 볼셰비키와 같은 패거리냐는 의혹으로 우파 세력의 반란을 낳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패착이었고 어쨌든 과거 사민당원이었던 또다른 좌파를 공격함으로서 독일 사회민주당은 스스로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고 말았다. 반면 비판자들 중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이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치당]]과 같은 과격한 정치집단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은 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집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로자의 혁명 역시 공상적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에 기반한 [[독일 공산당]]조차도 로자의 노선보다는 비슷하지만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문제는 공산당은 '''(정권을 잡을 수는 있어도) 결국 [[나치당]]도 자연히 망할거라고 믿고''' [[독일 사민당]]과 반목하는 한편, 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자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그의 노선과 주장은 저런 수직적,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 자체의 자발성, 자치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이나 자유지상주의 좌파 운동이 강했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오히려 더 각광을 받았을 정도다. 전후 [[동독]]에서 그를 기념하여 로자의 우표를 발행하고 로자의 동상을 건립해 의장대가 지키게 했다. [[베를린 U반]]에도 로자의 이름을 붙인 [[로자 룩셈부르크 플라츠역]]이 있었을 정도.[*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정치인들의 이름이 붙은 역명들을 바꾸었지만 이 역은 역명이 유지되고 있다. 자세한 역명 변경의 역사는 해당 항목을 참조.] 그는 반레닌주의자로서 레닌주의를 비난했으나, 의외로 친소국가인 동독이 기념한다는게 특이한 점이다. 한편 고향인 폴란드에서는 그가 폴란드 독립보다는 세계혁명을 주장한 점 때문에 평가가 좋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폴란드 인민 공화국|공산주의 체제 시절]]에도 룩셈부르크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47480&cid=59994&categoryId=5999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